예전 블로그에 쓴 글인데 통합 하는 중입니다.
예전꺼에 수정, 편집도 해서 좀 더 보강 합니다.
※ 웃자고 하는 소리도 있으니 목숨 걸고 태클은 사양.
그러나 너무 뜻이 다르게 해석되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 피드백 감사~
※ 조선초기 직급체계는 정리가 잘 안됨, 하륜대감 때문임.
하륜대감이 거의 한달에 한번씩 관제개편 하는 바람에 탄핵까지 받을 정도...
※ 시간 날때마다 계속 자료는 업데이트 함.
□ 처음 나라를 세울때 나라 이름 짓는 것도 큰일이었슴.
조선과 화령(和寧, 뒤에 영흥) 두가지의 안이 나옴.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작명 해달라고 함.
중국 황제... 조선(朝鮮) 땅은 에전에 기자(箕子)가 세운거 아님? 하며 당연히 조선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남.
중국이 세운 나라 기자... 화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곳의 지명을 빌려온듯 함.
□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이성계에 편에 서서 벼슬도 하지 않고 시골 가서 살고 있었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벼슬을 주는데 이성계에게 충성해서 한자리 하던 문하시중 배극렴(裵克廉)을 보고 "야이! 말장사꾼 같은 놈(마고,馬賈)"이라고 고려의 신하로써 충절을 꺽은 자들에게 훈훈하게 욕 시전.
□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태조가 죽였다고 사초에 기재한 사관을 태조가 친히 국문함.
나중에 곤장 100대 때리고 재산도 몰수를 하고 울진으로 귀양 보냈으나 지은 죄가 있는 태조는 얼마후 다시 이 사관을 다시 관직에 등용 했다 함.
□ 개국초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건의로 사관(史官)을 옆에 두고 사초(史草)를 기록하게 하였슴.
고려때 한가닥 하던 신하들이 우리도 임금 옆에 사관이 임금 말씀 기록 좀 해야 뽀대 나지 않겠음?이라고 이야기 함.
그때까지는 뭐 태조 이성계도 사관과의 트러블은 없었는듯.
임금이 온천가는데도 사관이 따라가서 사초를 쓰기도 하였으니...
즉위 말년 이성계가 지금까지 모아둔 사초를 보자고 함.
위에 우왕, 창왕을 태조가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 막 다시 적어 놓은게 아닌지...
"이 쉥키들이 혹시 내 욕 많이 적어 놓은거 아냐?" 몹시 궁금 하신듯.
사관들과 신하들 몇몇을 제외하고 일제히 반대함. 그래도 보자고함.
또 반대함. 그로부터 얼마 후 정종 임금 즉위 초 경연자리에서 사관들, 정종 임금의 쿨한 명령으로 사관들 다 쫓겨남.
□ 하루는 임금이 온천으로 목욕 가는 길.
가만히 보니 임금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던 대간(臺諫)들이 많이 따라 왔어 심기가 불편함.
대간들 그냥 돌아 가라고 하기는 뭣하니까 대간들 수행 하는 서리들이 너무 많다고 서리들 다 돌아가라고 함.
"야! 니네들이 말타고 오면서 곡식 밟는거 때문에 백성들에게 미안하자나. 그냥 한줄로 다시 돌아 가거라!!!"
원래 수행 비서들이 없으면 이불 보따리며 타고 가던 말먹이 같은거 줄 사람도 없고, 조선의 선비들은 시체나 다름 없으니..ㅎㅎㅎ
그때 대간들이 "수행 비서 없어도 우리는 임금을 따라 간다~!!!"라고 어거지를 피움.
도승지가 태조 임금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하고 몇마디 하다가 욕도 얻어 먹고, 결국은 임금이 이김.
몇 몇 제외하고는 다 도성으로 돌아가게됨.
□ 하루는 임금이 포도를 먹고 싶다하여 각처에 명을 내림.
발빠른 관리 하나가 잽싸게 포도를 임금께 바침.
그 관리 그날로 관직 2~3단계 레벨업 됨.
이틀 있다가 구해 바친 관리는 쌀 10석 하사... 동작 빠르면 생기는 것도 다름.
□ 태조때는 스님들이 거의 잉여 취급을 많이 받았슴.
궁궐 신축에 백성들을 동원하면 농사에 차질이 생긴다 하여 기술 좋은 스님들을 마구마구 동원하여 일을 시킴.
스님들 일 시키며 일당으로 쌀도 주고 옷도 주고 하니 불교를 좋아하던 태조의 뜻과도 딱 맞아 떨어짐.
□ 경복궁 북쪽 북악산에 성벽을 쌓은 일에는 북쪽 변방 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민간인 기술자 11만 8천명을 동원함.
궁궐 짓는 것 보다는 단순노동이라 민간인들을 많이 동원 한듯.
이 성벽이 요즘 북악산의 '서울성벽'이라고 부르는 곳임.
북악산은 원래 백악(白岳)산으로 불렸슴. 일제시대때 쪽바리에이션 쉐끼들이 북쪽 북자로 북악산이라 개명 하였다함.
왜냐하면 북쪽 북(北)자의 뜻이 도망가다의 뜻도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함.
아무튼 쪽바리 쉐끼들 어디가도 그지 같은 짓만 골라하는 쉐키들임.
□ 조선시대, 특히 초기때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시킬 경우 전부 농한기인 겨울에 시킴.
여름과 가을은 농번기라 하여 가급적이면 국가의 노역을 시키지 않음.
겨울에도 눈이 오거나 아주 추울경우 작업중지 시킴.
농사철에는 임금도 성 밖으로 잘 나가지 않음. 임금 행차 때문에 곡식을 훼손한다거나 농사일로 바쁜 백성과 고을 수령들이 영접을 나와야 한다는 이유임. 조선의 왕들은 진정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종결자였슴.
□ 태조 5년에 한양의 성벽이 어느정도 완성됨.
총길이는 18.5km 정도 되고 가장 낮은 곳의 높이가 4m, 가장 높은 곳이 8m 정도 되었다고 함.
□ 조선 초기 효녀 도리장.
한양의 성벽 쌓는 노역에 끌려 온 전남 장성의 한 촌부. 병이 들어 공사장 근처의 숙소에 들어 눕게됨.
임금이 농사철이라 하여 백성들을 돌려 보냈으나 이 촌부는 병 때문에 집에 못감.
고향에 있던 이 촌부의 딸이 한양에서 돌아온 고향 사람들에게서 이 소식을 들음.
"울 아부지 혼자 병들어 돌아가시는건 아닌가...ㅠㅠ"
이 용감하고 효성 지극한 딸이 무려 남장으로 변장하여 한양까지 아버지 찾으러 감.
우여곡절끝에 아버지와 상봉하여 극진한 병간호 끝에 아버지를 완쾌 시켜서 고향으로 모시고 감.
임금이 효녀라 칭하고 무명 몇필을 하사하심. 조선왕조실록 최초의 효녀로 기록되는 영광을 거머짐.
□ 태조는 한양의 성벽공사가 제대로 진행 되지 않자 농번기인 음력8월에 전국에서 7만9천명을 축성 노역에 동원하기도 함.
물론 동원된 백성들은 유급임.
□ 태조는 성벽공사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 자주 보임.
성벽공사를 담당하는 최하급 관리가 일꾼들과 함께 성벽공사에 쓰일 큰 돌을 옮기다가 어느 집 골목에서 골목이 비좁아 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슴. 할수 없이 골목의 집 담장을 약간 허물고 돌을 옮기는 중에 집주인 뛰어나옴.
이 집주인은 고려 말기 고급관리였슴.(퇴직 고위공무원)
"너 뭐하는 놈인데 우리집 담장을 허무냐?" "성벽 쌓는 돌 나르는 중인데요... 주절주절..."
"어라. 이 놈봐라... " 하고는 퇴직 공무원이 돌 나르던 공무원을 줘 패버림.
눈탱이 맞은 하급관리는 졸라 열 받지 않겠음. 다시 성벽 쌓는 관청의 상급관리에게 일러 바침.
분기탱천한 관리 "겨우 퇴직공무원 주제에 임금의 명을 받은 군사를 패?" 바로 임금에게 또 일러바침...
태조 임금. 고려때 한가닥 하던 퇴직 고급공무원이라 다른 처벌은 못내리고...
" 흠... 니네집 담장 고쳐줄께. 대신에 니네집 종 20명만 일단 보내라. 성벽 쌓는 일 마무리 하고 니네집도 고칠께..."
그래서 종 20명을 한양의 큰 대문 만드는 공사 끝날때까지 무급으로 불 먹었다고 함. 물론 이 20명이 일하면서 생기는 숙박비와 밥 값은 모두 퇴직 공무원 부담 해야 함.
이 퇴직 고급관리는 얼마후 이 사건 때문에 괘씸죄로 감방에 갇혔다가 열흘만에 풀어줌. 그런데 이때 그 퇴직 공무원의 노비들이 만든 큰 대문이 지금의 남대문임...
□ 임금 명으로 수릉(임금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의 비석을 옮기던 중 비석이 넘어지는 바람에 인부 89명이 골절, 타박상들을 입기도 함. 사고 규모로 봐선 피라미드 만드는 줄 알겟네...
□ 태조때는 지금의 태국과도 교류가 있었슴. 다만 맨날 쪽바리에이션 해적한테 중간에서 배 빼앗기고 사신 죽고 끌려가고 등...
□ 태조 5년(1396년) 6월. 모든 관청의 공무원들의 복장 규정을 통일하고 또 사모(紗帽)를 쓰고 다니라고 함.
이때부터 항상 공무수행 중에는 사모를 쓰고 다니는 역사와 전통이 생김.
사진출처 虎尾許居士의 블로그
□ 조선초기때 중국사신은 대부분 조선사람이었슴.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돌아갈때 수행비서로 우리나라 내시(고자)를 몇사람 붙여서 보냄.
그러면 중국에서 중국말도 잘 배워서 다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 보낼때 우리가 보냈던 내시를 뽑아서 보냈고 이 사신이 몇 차례 우리나라와 중국을 왔다갔다 하여 늙어 정년 퇴임 할 나이가 되면 이 고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영구적으로 복귀 시킴.
그런데 이 사신을 했던 내시들이 고향땅에서 행패가 엄청났다고 함.
"나 본토 물먹은 사람이야" 이 자식들이 행패 불리면 고을 수령은 물론 임금 조차도 크게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고 함.
□ 태조때 각 지방 군사의 수는 보병, 기병, 수군 등을 합하여 총 20만8백명.
□ 무인 출신인 태조, 임금으로써 공부하는게 당연히 싫었을터...
가끔 신하들이 태조한테 "공부 좀 하고 사셈"이러고 욕먹고 다녔슴.
또 한 달에 대여섯차례 있던 조회시간에도 불참 하기 일수였던 태조 임금.
신하들이 "나이에 안맞게 아침잠이 많으시구려~. 조회는 꼭 나오셔야 함요^^*" 이런 소리도 여러차례 들었음.
□ 임금이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데 신하 한 명이 코골며 앉아서 잠들어 버림.
탄핵을 받았지만 개국공신이고 나이도 많다고 하여 없었던 일로,,,
□ 태조때 노비의 몸값(奴婢)
그전까지는 품질(?) 좋은 노비의 몸값도 오승포 150필 정도임.(상급오승포 1필이 쌀2말정도임.)
질 좋은 말은 오승포 4~500필. 사람값이 말값보다 저렴하여 임금이 아예 노비의 가격을 일괄적으로 정함.
남,여 구분 없이 15~40세 사이는 오승포 400필, 14세 이하 41세 이상은 3백필.
노비가 도망가서 주인이게 노동을 제공하지 못한 경우 벌금 형식으로 1개월에 포3필. 이자 없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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